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랑 같이 살면서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 손에 자람. 지금은 스물한살.
중학교 때까진 할머니가 좋았고 같이 살면서 불편했던 점도 없었음. 고등학교 때는 가끔 나한테 엄마 욕을 하는 게 거슬리기 시작했지만 엄마랑 할머니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동조 안 하고 대충 넘기면 계속 하진 않으셔서 크게 불편하진 않았음.
그냥 그렇게 살아오다가 작년 추석에 할머니가 불편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김. 삼촌이 우리집에 오셨는데 다같이 밥을 먹고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랑 삼촌이 얘기를 하기 시작함. 우리집이 작기도 하고 방음도 잘 안 돼서 내가 방에 있는데도 밖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다 들렸음.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중간에 나에 대한 얘기가 나옴. 내가 그때 스무살이었고 나름 명문대에 진학했어서 처음엔 그에 대한 칭찬을 하셨음. 그러다 나에 대한 단점이나 내 컴플렉스에 대한 얘기를 삼촌한테 하기 시작함. 처음엔 살짝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할머니도 나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을 거고 저렇게 푸실 수 있지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내용이 깊어지더니 가족만 아는 내 컴플렉스에 대해 얘기하고 남한테 말하기 창피하고 내가 숨기려하는 점까지 전부 얘기하는 거임. 이건 진짜 아니다 싶어서 할머니한테 감. 화 누르고 애써 장난스럽게 왜 이렇게 내 욕을 해요~ 다 들려요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고 삼촌이 그런 거 아니야 하면서 대충 달래주고 용돈 주면서 얘기는 끊김.
근데 내가 진짜 빡친 포인트는 다음날임. 다음날 고모가 오셨는데 전날 삼촌한테 했던 얘기를 똑같이 또 하는 거임. 밖에 나가서 화낼까 어쩔까 고민을 하다가 추석인데 친척들 앞에서 분위기 망치기 싫어서 에어팟 끼고 내 방에 있었음. 대충 2-30분은 내 험담한 거 같았음. 다 집에 가신 뒤에는 살짝 진정이 돼서 이성적으로 할머니한테 내가 어제도 분명히 다 들린다고 했는데 왜 또 욕을 하시냐고 물어봄. 할머니는 그냥 웃고 넘기려 했고 내가 더 따지려는 순간 엄마랑 아빠가 오면서 상황이 그냥 넘어가게 됨. 이때 확실히 얘기하고 넘어갔어야 하는데 나도 후회 중임.
추석 이후로 할머니만 보면 내 욕하던 게 생각나서 지금까지도 할머니가 싫어하는 행동 일부러 자주 하고 먼저 말 잘 안 걸고 집에서 최대한 안 마주치려 하고 같이 밥 먹기 싫어서 일부러 나가서 먹고 오고 이러는 중임. 대놓고 화내고 툴툴거리고 할머니 싫어 이러진 않고 예의차리고 적당히 손녀로서 해야 할 일은 하면서 최대한 안 마주치고 말 안 섞으려는 정도임. 아마 내가 지금 빡쳐있는지도 모르실 듯. 나도 좋게 생각하고 그때 얘기를 잊으려는 노력 많이 해봤는데 잠깐 감정이 옅어지긴 해도 할머니 얼굴 보면 다시 또 떠오르더라. 단순한 뒷담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다 얘기한 점이 꽤 큰 충격이었나봄.
원래 전에는 할머니가 구시대적인 언행을 하시거나, 부모님에게 쟤 왜 저러니 이러면서 내 험담을 하시거나, 내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고모삼촌에게까지 보고하시거나(참고로 난 고모삼촌이랑 전혀 친하지 않고 따로 연락해 본 적도 없어), 정말 사소한 걸로 잔소리를 하시거나, 나한테 엄마 욕을 하시거나 이럴 때 모두 옛날 사람이니 저러실 수 있지하고 넘겼다면 지금은 그럴 때마다 내 욕하던 게 또 생각나면서 티는 안 내지만 속으로 아 또 저러네 ㅈ같다 싶음. 솔직히 요즘은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언제 돌아가시려나라는 생각까지 듦.
고작 이런 걸로 어렸을 때부터 키워준 할머니한테 이런 생각까지 하는 내가 너무 싫고 괴롭다.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데 너네라면 어떻게 할 거 같아?
+ 할머니한테 솔직하게 얘기하고 풀라는 댓글 있을 거 같은데 사과받는다고 해서 이런 생각이 사라질 거 같진 않아. 아마 그때 화내지 않고 참았던 이유도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나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... 이미 벌어진 일에 사과를 받든 화를 내든 달라지는 게 없을 거 같아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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